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왕의 여자 (문단 편집) == 세트장 == 시기적으로 [[임진왜란]] 전후를 다룬 극이고, 극이 시작하자마자 임진왜란이 일어나며, 선조는 여기저기 [[행궁]]으로 떠돌고, 한양 환도 이후에도 [[경복궁]], [[창덕궁]], [[창경궁]] 등이 모두 소실되어 당시로서는 옛 종친의 저택에 지나지 않았던 현재의 [[덕수궁]]을 행궁삼아 지내다가 이곳에서 승하하고, 광해군 2년에서야 창덕궁이 복구되어 이어하는데 중후반부 극의 대부분 내용이 이 정동 행궁 시절을 다루고 있고 드라마가 단축되며 광해군의 치세도 뭉텅 잘려져 나갔기 때문에 이 드라마의 상당 부분은 정동 행궁을 가장한 세트장에서의 모습이 방영되었다. 물론 이 시기의 상황을 적절히 반영하여 궁궐의 외부는 실제 궁궐이나 궁궐세트가 아닌 한국민속촌 중부지방 양반가 22호를 배경으로 촬영되었고[* [[용의 눈물]]에서 태종 [[태종(조선)|이방원]]의 사저, [[왕과 비]]에서 [[세조(조선)|수양대군]]의 사저 등으로 쓰였던 그 곳이다.] 내부 세트장 역시 궁궐 같은 세트가 아니라 양반가다운 세트에서 진행되었다.[* 물론 경복궁의 [[경복궁 강녕전|강녕전]]이나 [[경복궁 교태전|교태전]] 내부의 사진을 보면 알 수 있겠지만 실제 왕의 방 내부와 비교하여 보자면 [[크고 아름다운]] 데다가 단청까지 발라진 다른 사극들의 세트장이 잘못된 것이다.] 그래서 [[대장금]] 보다가 가끔씩 이 드라마를 본 사람들은 왜 저 드라마는 세트장이 저렇게 허접하냐? 시청률 망해간다더니 세트장도 허접하게 짓는 거냐?'는 오해 아닌 오해를 사기도 하였다. 그래도 [[광해군]]이 즉위한 이후 창덕궁을 재건했을 때부터는 실제 창덕궁에서 촬영을 진행하기도 했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